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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KIOM 블로그기자단

역사적 가치로 말한다, 구급방언해

  우리는 조선 시대에 발간된 의학서 하면 대개 「동의보감」을 떠올립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사극 '허준'의 영향이겠지요.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세종 때 집필에 들어가 성종 때 완성된 
「의방유취」라는 책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또한 주목해야 할 책이 있습니다. 세조 시기에 유통된 「구급방」입니다.





  세조 때 보급된 응급환자 대처 매뉴얼

  조선왕조실록에서 '구급방'에 대한 언급은 세조 대에 이르러 등장합니다.
  
  • 賜八道救急方各二件 (8도(道)에 구급방(救急方)을 각기 2건(件)씩 하사(下賜)하였다)
    (세조 39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6월 13일(임자) 1번째기사)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구급방」이라는 의학서는 적어도 세조 12년 이전에는 편찬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요?




  「구급방」에서는 위와 같이 응급 상황을 36개의 범주로 나누고, 그 상황에 맞는 응급처치 요령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령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냈다면, 일단 삼킨 물을 토하게 하고 묵은 생강을 환자의 이(齒)에 비비게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응급환자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한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적 가치는 대단해

  이 「구급방」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 「구급방언해」입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2003년 발간한 「구급방언해」의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의 원간본은 현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 16세기 중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복각본(覆刻本 : 원형을 모방하여 다시 판각한 활자로 펴낸 인쇄물)이 남아 있습니다.

  이 복각본은 세조 때 사용하던 글씨체인 을해자(乙亥字)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16세기 이전에 한자음 표기 방식으로 널리 사용했던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따르고 있어, 세조 집권 당시인 15세기의 국어 자료로서도 가치가 크다고 합니다.


<「구급방언해」의 한 페이지. 표시한 부분에서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위 사진을 보고,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다룬 훈민정음 서문을 떠올린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한자를 읽는 방식을 통일하기 위해 세종 때 「동국정운」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이 책에서 이와 같은 표기법을 최초로 사용했기 때문에 '동국정운식 표기법'이라고 합니다. 중국인들의 실제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표기하려는 방식이다 보니, 실제 우리가 한자를 읽을 때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습니다.

  또한, 역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동의보감」과 이 책을 통해 각각의 책이 발간될 당시의 사회 분위기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조선 역사는 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조선 전기의 주도 세력은 고려 말 이성계를 지지하여 조선 건국에 참여했던 '혁명파 사대부'와 그들의 후손이고, 조선 후기를 주도한 세력은 고려 왕조를 지키려던 세력, 즉 정몽주로 대변되는 '온건파 사대부'의 제자들입니다.

  전자는 후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국강병에 많은 관심을 보였기에, 조선 전기에는 국가가 주도하여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끌어냅니다. 조선의 실정에 맞는 역법(曆法 : 천체의 운행 등을 바탕으로 한 해의 주기적 시기를 밝히는 방법. 쉽게 말해 달력을 작성하는 기준이라고 보면 됩니다.)의 개발, 우리 실정에 맞는 의학서인 「의방유취」, 「향약집성방」의 편찬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반면 후자는 성리학을 사수하고 발전시키는 게 가장 큰 목표였기 때문에 과학 기술의 연구를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두 책의 저자를 통해 드러납니다. 「구급방」의 경우 누가 집필했는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국가에서 직접 팔도에 보급할 정도라면 국가 차원에서 펴낸 책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반면 「동의보감」은 허준 개인의 저서입니다. 국가가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즉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우리는 저자를 통해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급방」은 의학서로서의 가치 못지 않게 역사적인 가치가 충분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1. 구급방언해(상), 김동소 외 16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3
2. 구급방언해(하), 김문웅 외 15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3
3.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의  '구급방' 검색 결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k&query_ime=%EA%B5%AC%EA%B8%89%EB%B0%A9&keyword=%EA%B5%AC%EA%B8%89%EB%B0%A9
4. 고등학교 국사, 교육인적자원부, 2005

 = KIOM 블로그기자단 4기 김현혜